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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재

- 현 한화솔루션 고문

- 현 학교법인 북일학원 이사장

- 산문집 ”시간 길어 올리기"

- 전 대한일보, 동아방송 기자

                           

 




⃟  일 작센주, 드레스덴의 즈빙거 궁전은 화려하기로 이름 나 있다. 라이프치히와 마이센을 보러가는 길에 오래 전부터 보고 싶던 드레스덴에 들렀다. 높은 둑으로 둘러진 엘베강변 둔치에 서자 한 눈에 들어온 구시가지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왕궁을 상징하는 커다란 황금 왕관이 높게 얹혀있는 ”왕관의 문“은 푸른 하늘에 새겨 넣은 듯 선명하다. 슈탈로프 성벽, 2만개가 훌쩍 넘는 마이센 도자기 타일에 그려진 1백 미터가 넘는 길이의 ”군주의 행렬“은 장관이다. 


드레스덴을 18세기 유럽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로 이끌었던 작센의 선제후(選帝侯.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권을 가졌던 7명의 제후)이자 폴란드 왕도 겸했던 아우구스트. 그에게는 이름 뒤에 “The Strong”이라는 단어가 꼭 붙는다. 사람들은 ”강건왕 아우구스트“라 부른다. 

큰 권력을 가진 그가 궁전을 만들고 꾸몄다. 박물관 컬렉션도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 그 아름다운 건물들은 한 사람의 ”강건“의지에 헤일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의 힘이 합쳐져서 세워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해 1945년, 2월 13일부터 4일간 미국, 영국군의 폭격기는 수 만 발의 소이탄을 이곳에 퍼부었다. 이 곳은 동부전선으로 가는 물자 수송의 요충지였으며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 산업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훈련기지도 있는 군사 도시였다. 이 공습으로 엘베 강변의 피렌체라 불리는 이 아름다운 도시의 궁정을 포함한 90%이상의 건물들이 부서졌다.

원래 가톨릭 교회였다가 종교개혁 후 개신교회가 된 바로크 건축의 성모교회도 있었다. 모두 보물이었다. 이 때 시민들이 나섰다. 그들 선조의 땀으로 이룬 그러나 처참하게 부서진 보물의 잔재들을 넋 놓고 볼 수만은 없다는 마음이 모였다. 잿더미 속에서 불에 그을렸지만 그나마 성한 사암석 벽돌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수 만개는 되었으리라.



어느 건물에서 나온 것인지를 분류해 한 군데 씩 쌓아 모은 다음 일일이 번호를 매겼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훗날에 어떻게 쓰일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언젠가“를 위해 보관되었다. 아리안족의 핏줄을 이어 받은 게르만족은 히틀러도 배출하지만 이런 시민정신도 품고 있었다. 독일이 통일 된 후 20여년 이상 걸려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여기에는 당연히 시민의 ”벽돌“들이 요긴하게 쓰였다. 열망과 자긍심의 시민정신과 세계적으로 펼쳐진 모금, 그 힘이 합쳐 깔끔하게 이루어낸 역사(役事)였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시작이야 얼마 뒤의 얘기지만 파괴는 파괴로만 끝나지 않고 파괴적 창조, 창조적 파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한 리더의 의지와 민초들의 피와 땀이 뒤범벅되어 저 아름다움이 완성되었는데, 그걸 전투기에 싫은 포탄으로 무자비하게 부순 사람들은 누구이고, 또, 또, 그 걸 원래 모습대로 다시 세운 사람들은 누구인가. 모두 같은 시대에 사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이 한 일, 짓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어지니 조용한 분노가 일었다. 


그 분노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거야 어떻게 보면 큰 게 아니다. 무뎌져 버려 더 이상 분노가 아니게 된 게 세상에 너무 너무 많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린 아이들이 모래톱에서 모래성을 짓고 부수듯 미련하고 아둔한 인간들은 이런 짓을 오늘도 이곳저곳에서 반복하고 있다.

 

⃟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인 2021년 겨울이다. 가끔씩 가는 마포의 한 오피스텔 건물 1층에 중국 음식점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그 식당 유리문에 크게 붙어 있는 전단인가 광고물인가에 눈이 갔다.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식사 무료제공“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저희 음식점에 오셔서 직원에게 ”1인세트“라고 얘기해주세요, 

 식사를 마친 후 부담은 갖지 마시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다만 앞으로 당신이 여유로워 지실 때 

 주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유기 마라탕 직원 일동


얼핏 눈으로 한 번 읽고 한 글자씩 차근차근 다시 읽었다. 

아 이런--, 가슴과 머리가 동시에 쿵했다. 한동안 그 앞에 서 있다가 힐끔 안을 들여다보았다. 종업원이 보였고 카운터에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가 주인, 그 글을 써 붙인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모난 데 없는 얼굴이 그렇게 보였다. 


들어가 애기를 나누고 싶어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돌아서기로 했다. 써 붙인 글 속에 마음이 다 들어 있는데 굳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어보는 나도 대답하는 그도 대화는 뻔할 텐데, 괜히 중언부언, 사족(蛇足) 같은 얘기가 되고 겸연쩍어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운을 남기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황량하고 답답하고, 썰렁하고 울화통 터지는 일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이런 불빛들이 곳곳에서 반짝인다, 어느 쪽을 보면 세상이 곧 망할 것 같지만 작은 불빛들이 모여 살 맛 나게 해주는 기둥이 된다. 세상은 그래서 돌아간다.


이 식당은 그러나 1년인가를 있다가 문을 닫았다. 가뜩이나 장사가 힘들 시기, 명동 초입 상가의 공실율이 50%가 넘었다고 하던 때인데 ”한심한“ 선심까지 얹어 놓았으니 버틸 재간이 있겠나. 요즘은 다른 식당이 들어 왔다. 그 답답하고도 맑은 젊음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그러나 싱싱하게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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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5-10 16: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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